최근 지금의 상황이
2차대전 발생시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말들이 무성합니다.
이에따라, 2차 세계대전 당시
경제, 군사및 지정학적 관계가
지금과 어떻게 유사했는지 알아 보고자
이글을 작성합니다.
지정학적 관계와 경제적 요인 분석
1. 전쟁 발발 전후의 동맹 관계와 역학
전쟁 발발 전 (1939년) –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세계 강대국들은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폴란드 등의 안보를 보장하며 협력하고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936년 이후 “로마-베를린 추축”을 형성하여 파시스트 동맹을 맺었고, 이후 일본도 1940년 삼국 동맹 조약으로 가담하여 추축국( Axis Powers) 진영을 이루었다. 소련은 한편으로 1939년 독일과 불가침 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어 일시적으로 독일과 이해 관계를 같이하였으나, 이 조약은 비밀리에 동유럽 분할 약속을 포함한 편의적 협정에 불과했다. 미국은 고립주의 기조로 인해 공식 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영국·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사실상 연합국 편에 기울어 있었다.
이러한 구도에서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될 당시, 전 세계 동맹 지도는 명확히 양분되었다. 파랑색으로 표시된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연합국과 그 식민지들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연대하였고, 검정색의 독일, 이탈리아, 일본 추축국은 세력권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소련은 초기에는 중립 내지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며 소극적 동맹 상태였다en.wikipedia.org. 1939년 당시 소련은 폴란드 동부와 발트 3국 등 세력 확장을 모색하면서도 독일과의 전면전을 유보하고 있었고, 미국은 공식적 참전 없이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향후 전황에 중요한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쟁 후 (1945년) – 1945년 독일과 일본의 패망으로 추축국 동맹은 해체되고, 전쟁 승자들 간의 새로운 긴장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시에 협력하여 추축국을 무찔렀던 미국·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연합국과 소련은 곧바로 서로 대립하는 냉전 구도로 재편되었다. 독일은 동서로 분할되어 서독은 서방 진영, 동독은 소련 영향권에 놓였고, 일본은 미국의 군정 하에서 비무장화된 채 서방 진영에 편입되었다. 전간기에 우방이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 후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적대 관계로 돌변했고, 영국·프랑스는 미국 주도의 서방 동맹(NATO 창설 등에 참여)으로 결속하였다. 반면 동유럽에는 소련 위성국들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블록화가 진행되었다.
전후 세계 지도를 보면 파란색의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방 진영과 붉은색의 소련 및 공산권으로 양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전쟁 이전의 다극 체제와는 달리 양극 체제로의 급속한 전환이었다. 전쟁 직후 유엔(UN)이 창설되어 전승국 간 협력이 모색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이 세계 패권을 두고 대치하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한때 동맹이었던 국가들이 이념에 따라 갈라서면서, 세계 지정학 질서는 추축국 vs 연합국 구도에서 곧바로 자유 진영 vs 공산 진영의 대립 구도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후 합종연횡은 독일의 분단, 한반도 분단 등으로도 나타났으며, 이후 수십 년 간 국제 질서를 규정짓는
배경이 되었다.
2. 주요국의 전쟁 전후 경제적 위상 비교
2.1 1938년 무역 수지: 수출입 규모와 흑자/적자
2차 대전 발발 직전 각국의 경제력을 살펴보면, **무역 구조와 수지(收支)**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아래 표는 1938년을 기준으로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소련, 프랑스의 수출입 규모와 무역수지를 정리한 것이다 (금액 단위: 백만 달러, 괄호 안은 무역 흑자 ‘+’ 또는 적자 ‘–’):
국가 | 수출 (1938) | 수입 (1938) | 무역수지 |
미국 | 약 1,950 | 약 1,180 | +770 (흑자) |
영국 | 약 1,500 | 약 1,700 | –200 (적자) |
독일 | 약 4,550 (RM 기준) | 약 4,330 (RM 기준) | +220 (흑자) |
일본 | 약 270 | 약 770 | –500 (적자) |
소련 | 약 450 | 약 500 | –50 (적자) |
프랑스 | 약 600 | 약 700 | –100 (적자) |
주: 독일 수치는 라이히스마르크(RM)로 표시된 것을 달러 환산한 추정치.
표에서 보듯이, 미국은 세계 최대 공업국으로서 상당한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대공황 후반에 다소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수출이 수입을 크게 상회하여, 1938년 약 7억 7천만 달러의 흑자를 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식민지로부터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구조였으나, 1930년대 후반에도 수입액이 수출액을 약간 상회하여 소규모 무역적자를 보였다. 영국은 당시 파운드화 블록 및 제국특혜관세제도를 통해 자국 및 식민지 간 무역을 장려했으나, 식량과 원료 수입이 많아 수출로 완전히 메우지는 못했다. 독일의 경우 나치 정권 하에서 엄격한 수출장려·수입억제 정책(New Plan 등)을 펼친 결과 1938년 명목상 흑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외환 부족을 막기 위한 인위적 조치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독일은 석유, 고무 등 필수 물자의 국내 생산이 부족하여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경제 압박이 상당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막대한 수입을 해야 했고, 미국으로부터 석유·철스크랩 등을 사들였기 때문에 큰 폭의 무역적자를 겪었다. 즉, 수출로 번 외화 이상으로 전쟁 자원을 수입하는 구조였다. 소련은 공산주의 체제로 비교적 폐쇄경제를 지향하여 대외무역 규모 자체가 작았다. 1930년대 후반 소련의 대외무역은 주로 원자재 (곡물, 원유 등) 수출과 기계류 수입으로 구성되었으며, 1938년 경에는 수입 약 5억 달러, 수출 약 4억 5천만 달러 선으로 약간의 적자 또는 균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전쟁 직전 소련은 독일과 한때 교역 협정을 맺어 독일에 원자재를 보내고 공산품을 받기도 했으나, 교역 규모는 전체 경제에서 크지 않았다.
이러한 무역관계의 차이는 국제 관계에도 반영되었다. 가령 미국과 영국은 상호 무역 및 투자로 긴밀히 연결되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반면, 독일과 일본은 필요한 물자의 상당 부분을 자신들의 영향권 밖(미국 등)에서 수입해야 하는 취약성이 있었다. 일본은 1941년 미국으로부터 석유 공급이 차단되자 불과 수년분의 비축유만 남게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남방 자원지대 침략을 결심하는 등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을 견제) 무역·자원 문제가 외교군사적 선택을 크게 좌우하였다iwm.org.uk. 한편 독일-소련 경제협정(1939)은 상호 이익에 의해 맺어졌는데, 소련은 독일에 원자재(곡물, 유전제품 등)를 공급하고 독일은 소련에 기계류와 군사장비를 공급하여 일시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전쟁 준비를 위한 일시적 편의동맹에 불과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깨지게 되었다. 결국 경제적 상호의존이나 보완관계의 부재는 추축국과 연합국 간 갈등을 심화시켰다.
2.2 공업 생산력: 1938년 vs 1946년
전쟁 전후 각국의 공업 생산 수준 변화는 그 피해와 성장 양상을 극명히 보여준다. 아래 표는 주요 교전국들의 산업 생산량 지수를 전쟁 직전(1938년)과 전쟁 직후(1946년)로 비교한 것이다. 1938년 생산 수준을 100으로 정규화하여, 전후 1년 뒤인 1946년에 각국이 어느 정도의 생산력을 보였는지 나타낸 값이다:
국가 | 1938년 산업생산지수 | 1946년 산업생산지수 (1938=100) |
미국 | 100 (대공황 후반) | ~140 (전쟁 특수로 급증) |
영국 | 100 | ~95 (전시 생산 후 약간 감소) |
독일 | 100 | ~30 (전후 피폐)econlib.org |
일본 | 100 | ~30 (전후 피폐)publish.iupress.indiana.edu |
소련 | 100 | ~110 (전쟁 전 수준 회복) |
프랑스 | 100 | ~80 (전후 복구 중) |
주: 수치는 1938년 = 100 기준 추정치. 미국은 1943년경 전시정점시 300 이상까지 치솟았으나 1946년 민간경제 전환으로 일부 감소.
미국 –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공업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방대한 전시 생산(군수품 제조)의 결과로 1945년 무렵 미국은 전세계 산업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으며doncio.navy.mil, 전후에도 그 거대한 생산 기반이 유지되었다. 1946년에는 전시 피크보다는 다소 감소했지만 여전히 1938년에 비해 약 1.4배 이상의 산업 생산 규모를 보였다. 미국 본토는 전쟁 피해를 직접 입지 않았기 때문에, 신규 공장과 인프라가 고스란히 민간 생산으로 전환되어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의 경제력으로 이어졌다.
영국 – 영국은 전쟁 내내 본토가 일부 공습 피해를 입었으나 산업 기반은 상당 부분 보존되었다. 전시에는 총력전 체제로 생산성이 높아졌고, 전후 1946년에는 군수품 생산 감소로 일시적으로 생산 지표가 떨어졌으나 곧 회복되어 1947년에는 1938년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다en.wikipedia.org. 따라서 1946년 기준으로 보면 약 1938년의 90~95% 수준의 생산력을 보유했고, 전후 복구 속도도 빨랐다. 다만 전쟁 비용으로 인해 영국의 재정 부담과 노후 설비 문제가 남아 있어, 이후 미국의 원조(마샬 플랜) 등을 받으며 산업을 근대화해야 했다.
독일 – 독일의 산업은 전쟁 말기와 전후 초기 거의 붕괴 상태에 놓였다. 연합국의 대규모 폭격과 전투로 공장 시설, 인력, 자본이 크게 손실되었고, 1945년 항복 당시 대부분의 생산 활동이 정지되었다. 그 결과 1946년 독일(특히 분할된 서독 지역)의 공업 생산은 1938년의 30% 수준에 불과했으며, 1947년에도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다econlib.org. 산업 생산 지표만 놓고 보면 독일은 전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였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게 된다. 이러한 생산력 붕괴는 전후 독일이 국제 무대에서 주도권을 상실하고, 미국·소련의 지원과 감독 하에 재건을 모색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일본 – 일본 역시 1944~45년 미군의 본토 공습과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사회 인프라 붕괴로 인해 산업 생산력이 전쟁 전의 일부만 남았다. 1946년 일본의 제조업/광공업 생산은 1938년의 약 30% 수준까지 추락했고publish.iupress.indiana.edu, 산업 시설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가동을 멈춘 상태였다. 특히 연료와 원자재 공급망이 끊겨 전후 초기에는 공장 가동률이 극도로 낮았다. 일본은 **미군정기의 경제개혁과 미극동원조(GARIOA 등)**를 통해 겨우 기초산업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1950년대 초까지는 1930년대 수준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했다.
소련 – 소련은 전쟁 초기 독일의 침공으로 서부 지역의 공업 지대가 초토화되었으나, 전쟁 기간 중 우랄 산맥 동쪽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계속된 생산 투자를 한 덕분에 1944년경에는 산업 생산이 1940년 수준을 약간 웃돌 정도로 회복되었다en.wikipedia.org. 1930년대 소련은 강력한 산업화 정책(5개년 계획)으로 1938년 생산력이 매우 높아진 상태였는데, 전시에 큰 타격을 받고도 전후 복구력 역시 강했다. 1946년 소련의 공업 생산은 대략 1938년과 비슷하거나 조금 상회하는 수준(110% 내외)까지 돌아왔으며, 1950년에는 전쟁 전의 약 2배에 달하는 급속한 성장을 이뤄냈다. 다만 이러한 회복은 막대한 인명 희생과 혹독한 국민 생활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소련은 전후에도 서방의 지원을 거부하고 자체 자원으로 복구를 진행하여, 국민 소비보다는 중공업과 국방산업 위주로 생산을 집중시켰다.
프랑스 – 프랑스는 1940년 패전과 독일 점령으로 산업이 침체되었다가, 1944년 해방 후 서서히 재건을 시작하였다. 1946년 프랑스의 산업 생산은 1938년의 약 70~80% 수준으로 추정되며,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회복이 더뎠다. 이는 전쟁 피해와 더불어 정국 불안, 식민지 전쟁 등에 따른 자원 분산 등의 영향이 있었다. 그러나 **마샬 플랜(미국의 경제원조)**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로서 자금을 지원받아, 1947년 말에는 산업 생산이 전쟁 전 수준에 거의 근접하게 되었다en.wikipedia.org. 이후 프랑스도 제4공화국 하에서 계획경제적 요소를 도입(몽페랑 계획 등)하며 빠른 산업 성장을 이루었다.
2.3 경제력과 무역관계가 동맹·적대에 미친 영향
전쟁 전후의 이러한 경제력 격차와 무역 구조는 각국의 동맹 관계와 적대 구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먼저, 자원 보유 여부와 교역망의 유무가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광대한 식민지나 영향권을 통해 원자재 접근성이 높고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investopedia.com. 이들 국가는 비교적 안정적인 무역을 영위하며 상호 협력을 도모할 여력이 있었고, 경제 체제가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자유무역 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자국 내 자원은 부족하지만 세계 대공황 이후 기존 무역질서에서 소외되거나 보호무역 장벽에 직면하여 경제적 고립감을 느꼈다investopedia.com. 영국이 자국 및 식민지로 구성된 파운드 블록 내부에서 특혜무역을 강화하고, 미국이 높은 관세로 자국 시장을 보호하는 상황에서 독일과 일본은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이들은 필요한 자원을 무력으로 확보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호전적 동맹이 형성되었다.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손잡은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식민지와 자원이 부족하고 해양 세력에 맞설 대륙세력 연합을 지향했기 때문이다investopedia.com. 이 추축 동맹은 경제적으로는 상호 교역이 많지 않았지만 (지리적 거리 등의 이유), 공통의 상대인 영미 세력에 대항하는 이해관계로 뭉쳤다.
또한 경제 요인은 전략적 제휴와 배신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1939)은 순수 이념과는 무관하게 상호 이익(영토 분할, 무역)을 바탕으로 한 일시적 협력이었다. 실제로 두 나라는 조약 직후 경제 협정을 맺어 독일이 소련으로부터 원유, 곡물, 광물 등을 공급받고 그 대가로 기계류와 기술을 제공하는 거래를 했다. 이 거래는 독일이 전쟁 준비를 위해 꼭 필요로 한 자원을 얻는 창구 역할을 했고, 소련도 전쟁 대비에 필요한 설비를 들여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 궁극 목표가 상충되었기에, 독일은 1941년 석유 확보 등을 위해 소련 침공을 강행하며 경제 협력 관계를 배반했다. 이는 자원 확보 경쟁이 동맹을 뒤흔든 사례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도 교역의 단절이 곧 전쟁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1930년대 말까지 석유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했는데, 중국 침략을 지속하고 동남아로 위협을 확대하자 1941년 미국이 석유 금수조치로 대응하였다iwm.org.uk. 이 경제 제재로 일본 경제는 결정타를 맞았고, 결국 남아있는 2년 치 석유로 승부를 보기 위해 동남아 식민지(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유전 등)를 무력 점령하기로 한다iwm.org.uk. 그러나 남방 진출에는 필연적으로 미군과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에, 일본은 태평양 함대가 주둔한 진주만을 선제공격하며 전면전에 나섰다. 이처럼 **무역 관계 악화(특히 자원 봉쇄)**가 전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경우도 있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경제 협력은 양국 동맹을 한층 강화시켰다. 미국은 랜드리스법(무기대여법)을 통해 1941년부터 막대한 군수물자와 원자재를 영국 및 중국 등에 제공하여 경제적 지원이 군사동맹으로 연결되었다. 영국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 지속이 어려운 처지였고, 이는 자연히 미국 주도의 연합국 체제에 긴밀히 결속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전쟁 중 열강들은 **브레튼우즈 회의(1944)**를 통해 전후 자유무역과 경제안정을 도모하기로 협의하였는데, 이는 경제 체제가 유사한 국가들(주로 자본주의 진영)의 전후 협력 기반을 다지는 결과를 낳았다.
요약하면, 경제력과 무역관계는 전쟁 당사국들의 협력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 핵심 배경이었다.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국가들은 동맹을 통해 부족분을 보완하거나, 기존 질서를 타파하고자 공격적으로 행동했다. 반대로 경제망이 연결된 국가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동맹으로 뭉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경제 요인들은 이념, 영토 문제와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의 밑바탕을 이룬 것이다.
3. 전쟁 발발 원인: 표면적 계기 vs 실제 동기
3.1 표면적 발발 계기
유럽에서의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이 침략이 발발 계기가 되어 영국과 프랑스가 즉각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촉발되었다. 이는 표면적 원인으로 흔히 지목되는데, 국제 조약을 어긴 명백한 공격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도 독일은 오스트리아 병합(1938.3),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점령(1939.3) 등 침략을 이어왔으나, 폴란드 침공이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판단한 영국·프랑스가 더 이상 유화정책을 지속하지 않고 전쟁을 선택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직접 계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의 진주만 기습공격이었다. 일본이 미국 해군 기지를 급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미국은 즉시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참전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영국령 말라야와 홍콩을 공격하면서 영국, 호주 등에도 전쟁을 확산시켰다. 이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세계대전도 본격화되었다.
이외에도 이탈리아의 참전(1940년 6월, 프랑스 항복 직전 독일 편에 참전)이나 독일의 소련 침공(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등도 중요한 전쟁 확대 계기로 꼽힌다. 그러나 이들 사건 역시 그 직전의 지정학적 긴장과 계산에 따른 결과였다. 이를테면 독일-소련 전쟁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벌어진 것이지만, 애초에 협정이 한계에 다다른 상태에서 독일이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3.2 전쟁의 실제 동기와 근본 원인
표면적인 사건들 이면에는 복잡한 구조적 동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식민지 쟁탈, 시장 확보, 자원 획득, 그리고 경제 패권에 대한 갈망과 경쟁이 그것이다investopedia.com.
우선 독일의 동기를 살펴보면, 나치 독일은 제1차 대전 패전의 복수와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히틀러는 독일이 잃어버린 영토와 위상을 회복하고자 했으며, 인종이론에 기반한 “레벤스라우ム(Lebensraum, 생활권)” 획득을 주장했다. 이는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독일 민족이 거주하고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개념으로, 특히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코카서스의 유전 등 자원 풍부한 지역을 목표로 삼았다. 독일은 1930년대 내내 군비를 증강하면서 이러한 팽창을 준비했으며,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것도 독일 민족 통합과 전략 요충지 확보라는 계산이 있었다. 궁극적으로 폴란드 및 소련령 서부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유럽 대륙의 패권과 자원 독점을 노렸던 것이다. 따라서 폴란드 침공은 단순한 영토 욕심 이상의, 유럽 질서를 뒤엎고 독일 주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의도의 발현이었다.
일본의 경우에도 영토 확장과 자원 확보가 핵심 동기였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석유, 고무, 철광석, 식량 등 필수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 수입에 의존했는데, 1930년대 초부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륙 침략을 단행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장악하고 괴뢰 정권(만주국)을 세운 것은 북방으로 진출해 석탄, 철 등 자원을 얻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로 세력을 넓힌 것도 중국의 시장과 자원을 장악하려는 목적이 컸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는데, 이는 아시아를 서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경제 블록을 만들려는 야망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동남아시아의 풍부한 자원(특히 인도네시아의 석유, 말레이시아의 고무와 주석, 필리핀의 광물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진 정책은 필연적으로 당시 그 지역 식민지들을 지배하던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충돌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판단 아래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자원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전쟁 발발로 이어진 사례라 할 수 있다iwm.org.uk.
이탈리아는 1920~30년대 파시스트 정부(무솔리니 치하) 하에서 “신 로마제국” 부활을 외치며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이탈리아는 산업화가 덜 되어 자원도 부족하고 경제도 취약했는데,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와 발칸 반도에서 새로운 식민지를 얻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식민지화했고, 알바니아(1939년)도 강점했다. 이탈리아의 전쟁 동기는 부분적으로는 국내적 불만을 외부 정복으로 돌리려는 것(국민적 열광 조성),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대공황 이후 파시스트 경제의 활로를 제국 건설에서 찾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산업력은 상대적으로 약해 독일에 크게 의존했으며, 제국 건설 야망은 독일의 지원 없이 실현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탈리아는 독일과의 동맹을 택하여, 독일의 전쟁에 편승함으로써 전리품을 얻고자 했다. 이는 부강한 동맹국의 힘을 빌려 자신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동기로 볼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현상 유지를 위해 참전했다. 이들 민주주의 국가들은 1930년대 후반까지는 전쟁을 피하려고 했으나, 독일의 지속적인 도발로 유럽 균형이 깨질 위기에 처하자 결국 무력 대응에 나섰다. 영국·프랑스의 전쟁 목적은 초기에 폴란드 등 침략당한 국가들의 해방과 독일 군국주의 억제였다. 그러나 1940년 프랑스가 패망하고 영국이 혼자 버티는 상황이 되자, 영국의 전쟁 목적도 생존을 건 방어로 바뀌었다. 처칠 총리는 미국을 끌어들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을 최우선 전략으로 삼았고, 나아가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의 종식을 이념적 목표로 내세웠다. 프랑스는 비시정부와 자유프랑스 임시정부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결국 전쟁 승리에 참여하여 자국의 해방과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회복을 목표로 했다. 이들 연합국의 동기는 방어적이고 규범적인 측면(침략자 응징, 국제 평화 회복)이 강했으나, 동시에 전후 질서 재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는 현실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전후 자국 식민제국의 유지와 소련 공산주의 팽창 견제를 염두에 두었고, 프랑스 역시 독일에 대한 영향력 확보와 자국 재건을 위한 전리품을 기대했다.
소련의 전쟁 동기는 처음에는 방어적 중립이었다가 나중에는 공격적 팽창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 독일의 위협이 커지자 서방과도 손을 잡으려 했지만 (영불소 3국 협상 실패), 끝내 독일과 타협하여 시간을 벌고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실리를 선택했다. 1939년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뒤 소련은 동부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카렐리아 일부, 루마니아 베사라비아 등을 차지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이 배신하자 소련은 대조국전쟁에 돌입, 국가 생존을 위한 총력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전쟁 목표는 “히틀러 파시즘 격퇴”로 정립되었고, 궁극적으로 동유럽에 소련의 영향권 구축이라는 전략적 목표가 더해졌다. 전쟁 막바지 소련군이 동유럽 대부분을 해방/점령하게 되면서, 소련은 공산주의 이념 전파와 안전보장 지대 확보를 추진했다. 이는 전후 폴란드, 동독, 발트 국가 등에 친소 정권을 세우고 냉전을 불러오는 배경이 되었다. 요컨대, 소련은 초기에 생존과 국토방위를 위해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패권 확대라는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
정리하면, 2차 세계대전의 실제 동기는 단순히 표면적인 사건 이상의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경제 대공황과 보호무역으로 인한 국제 교역 질서 붕괴, 식민지 분포의 불균형으로 인한 자원 접근성 격차, 파시즘·군국주의 체제의 등장으로 인한 공격적 외교, 그리고 제1차 대전의 불완전한 종결(베르사유 조약의 후유증) 등이 그것이다investopedia.com. 특히 교역권과 식민지·무역 패권 경쟁은 독일·일본 등에게 전쟁을 통한 현상 변경의 동기를 제공했다. 한편 이념적 대립(민주주의 vs 파시즘 vs 공산주의)도 선전과 동원에 이용되었지만, 그 이면의 핵심 추진력은 국가 이익과 권력 투쟁이었다. 각 국가는 전쟁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국제질서의 구축을 목표로 했으며, 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다층적인 동기들이 폭발적으로 분출한 결과였다.
4. 전후 국제질서의 변화
4.1 전후 무역 질서와 경제적 위상의 변화
제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 경제 질서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전쟁 전까지는 여러 경제 강국이 존재하고 식민지 체제가 경제를 뒷받침했으나, 전후에는 미국이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945년 당시 미국은 세계 산업생산의 50% 가량을 차지하고 금 보유량의 다수를 소유하는 등 경제적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doncio.navy.mil. 이는 전쟁 기간 중 미국 본토가 파괴를 입지 않은 채 생산설비를 극대화한 결과로, 전후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국제 통화 체제를 주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수립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세계은행)이 만들어지고, 1947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발효되는 등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 질서가 자리잡았다. 이는 전간기의 보호무역과 블록경제 체제의 종언을 의미했다. 미국은 전후 마샬 플랜 등을 통해 유럽을 원조하며 자유진영 국가들의 경제 부흥을 도왔고, 자국 산업의 기술과 자본을 전세계에 투입하여 글로벌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영국과 프랑스 등 구대륙 강대국들은 전쟁으로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영국은 전승국이었으나 막대한 전비 지출과 본토 피해로 인해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파운드화의 위상이 흔들렸다. 전후 1940년대 말 영국의 수출은 1938년의 60% 수준에 머무를 정도로 무역력이 축소되었고en.wikipedia.org, 식민지에 대한 통제력도 줄어들었다. 프랑스도 산업 생산은 빠르게 회복했으나 재정과 인프라 측면에서 미국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결과 전후 이들 국가는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착취보다는 유럽 본토 재건과 미국과의 협력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식민지 독립의 물결로 인해 1950~60년대에 걸쳐 영불의 해외 시장 독점은 붕괴되고, 과거 식민지들은 독자적 무역 노선을 걷거나 미국·소련과 새로운 경제 관계를 맺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 제국주의 무역체제는 종말을 맞고, 다자간 무역체제와 블록화된 냉전체제의 경제(자유진영 vs 공산진영 교역 단절)로 재편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전후 초기에는 패전으로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되었으나, 미군정 및 연합군의 지도 하에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며 재건을 시작했다. 특히 서독은 1948년 화폐개혁과 시장개방, 그리고 마샬 플랜 지원으로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 성장을 이루어 1950년대 중반에는 주요 산업국 지위를 회복했다. 일본도 1950년대 한국전쟁 특수 등을 발판으로 “경제 기적”을 일궈내며 아시아 경제강국으로 부상했다. 흥미로운 점은, 전전(戰前)에 적대 관계였던 미국이 전후 독일·일본의 부흥을 도왔고, 이를 통해 이들 국가를 소련을 견제하는 동맹으로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와 안보가 결합된 전후 질서의 특징으로, 서독과 일본은 미국 주도의 무역질서와 안보동맹(NATO, 미일안보조약)에 깊숙이 연계되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과 일본은 전후 세계경제에서 서방 진영의 제조업 중심지로 재도약하여,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함께 소련에 대응하는 경제적 힘을 제공했다.
소련과 동구권은 서방과는 별도로 폐쇄적인 무역 경제권을 형성했다. 소련은 전후 동유럽 위성국들을 모아 코메콘(COMECON, 경제상호원조회의)을 1949년 설립하여 자체 무역블록을 구축했다. 이 블록 내에서는 소련이 원자재와 에너지를 공급하고 동유럽이 공산품을 생산·교환하는 계획경제적 무역이 이뤄졌다. 그러나 소련권은 기술혁신과 소비재 생산에서 서방에 뒤처졌고, 대외교역도 사회주의권 외에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양대 진영 간 교역은 최소화되었고, 특히 전략물자인 첨단제품이나 군사관련 물자의 경우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러한 분단된 무역 체제는 냉전의 경제적 측면으로서, 세계를 자유진영 시장경제권 vs 공산권 계획경제권으로 양분했다. 다만 비동맹 또는 중립국가들은 서방/공산 어느 쪽과도 거래를 트기도 했고, 1960년대 이후 제3세계 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경직성이 완화되긴 했다.
4.2 전쟁 전·중·후 동맹 관계와 국제 질서의 합종연횡
전쟁 전 (1930년대 후반) – 2차 대전 직전의 국제 동맹 구도는 전쟁 중과 전후를 이해하는 대비점이 된다. 1930년대 중반까지 영국·프랑스·미국은 집단안보보다는 각자도생에 가까웠고, 별도의 공식 군사동맹을 맺지 않았다. 소련은 1934년 국제연맹에 가입했으나 서방에 대한 불신이 깊었고, 파시스트 국가들과는 이념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 독일-이탈리아-일본은 **방공협정(코민테른 협약, 1936)**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협력을 선언하며 접근했다. 1937년 이탈리아, 1940년에는 일본이 독일-이탈리아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추축국 삼국 동맹이 완성되었다. 이에 대응해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폴란드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폴란드 침공 시 자동 개입을 약속하는 등 방어적 동맹을 구축했다. 전쟁 발발 직전 유럽은 이렇게 추축 vs 반추축 대립이 명확했지만, 미국과 소련은 아직 가담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은 중립법 등을 통해 고립주의 노선을 견지했고,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일시적으로 추축과 타협한 독자 행보를 보였다. 이 시기의 동맹 관계는 매우 가변적이어서, 독일-소련처럼 원수지간이 손을 잡는 일도 벌어졌고(공동으로 폴란드 분할), 이탈리아처럼 처음엔 독일에 회의적이었다가 후에 편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전쟁 전 국제 질서는 불안정하고 재편성의 움직임이 활발한 시기였다.
전쟁 기간 (1939~1945) – 추축국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연합국 측에도 **대동맹(Grand Alliance)**이 형성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소련과 미국의 연합국 편 참가이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소련은 연합국에 합류했고,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도 참전하여 영국, 소련, 미국의 3대 강국 연합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반파시즘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뭉쳐 연합국을 이끌었다. 영국-미국은 전통적 우방이었고, 소련과도 1942년부터 미·영·소 3국 동맹으로서 리스본, 테헤란, 얄타 회담 등을 통해 전쟁 전략을 조율했다. 중국도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연합국 주요 참가국으로 인정받아(카이로 선언 등) 대일전에 임했다. 연합국은 1942년 1월 워싱턴에서 26개국이 모여 **연합국 공동선언(United Nations Declaration)**을 발표하고 추축국 패배까지 개별 강화를 맺지 않겠다고 서약함으로써 결속을 다졌다. 한편 추축국 내에서는 독일-이탈리아가 긴밀히 협조하여 유럽 전선을 유지했으나, 일본은 지리적 분리로 인해 실질적 공조가 제한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서로를 지원하기 어려웠고 전략도 따로 움직였다. 또한 추축국 내부에서도 불균형이 컸는데, 독일이 압도적 주도권을 행사하고 이탈리아와 일본은 각자 전장을 꾸려나갔다.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 침공을 받아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추축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후 독일은 헝가리, 루마니아 등의 동유럽 위성국에 의존해 전쟁을 이어갔으나, 이들마저 1944~45년에 소련군에 속속 항복하거나 전향하였다. 전쟁 말기 동맹 구도는 연합국의 압도적 우세로 기울었고, 1945년 5월 독일 무조건 항복, 8월 일본 항복으로 추축 진영은 소멸했다.
전쟁 직후 및 냉전 초기 (1945~1950년대) – 전승을 거둔 동맹은 오래가지 않아 두 진영으로 갈라섰다. 2차 대전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미국과 소련 간의 불신이 싹텄는데, 이는 전후 독일 처리와 동유럽 문제 등을 두고 표면화되었다. 소련은 동유럽에 친소 공산 정권을 세우고 독일에 막대한 배상과 비군사화를 요구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자유선거 실시와 경제 재건을 주장하며 충돌했다. 이러한 이견은 1946년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1947년 트루먼 독트린 발표 등으로 공론화되었고, 전우였던 미·영과 소련은 급속히 적대적 블록을 형성했다. 1949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결성되자 이에 대응해 1955년 소련과 동구권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군사적 동맹도 서방 vs 공산권으로 확연히 양극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과 일본의 지위 변화는 극적이었다.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어 서독(독일연방공화국, 1949)과 동독(독일민주공화국, 1949)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서독은 1955년 NATO에 가입하여 과거 적이던 미·영·프와 동맹 관계가 되었고, 동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이 되어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후 주권을 회복(1952)하였지만 군사적으로는 미국과 양자안보조약을 맺어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이 되었다. 이처럼 패전국들은 전후에 승전국 진영으로 흡수됨으로써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도 1949년 NATO에 가입하여 서방 동맹의 일원이 되었고, 냉전에서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유엔(UN)의 창설(1945)**은 전후 국제 협력의 새로운 틀을 제공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다섯 나라(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가 각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장이 되었다. 특히 미소 대립으로 유엔은 냉전 기간 동안 군사적 분쟁 조정에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과 관련 기구들은 경제사회 분야 등 비안보 영역에서 국제 협력을 추진하며, 이전의 국제연맹보다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국제 질서의 골격을 마련했다.
결론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동맹과 국제 질서는 급변하였다. 전전에는 다수의 열강들이 복잡하게 얽혔던 국제 관계가, 전쟁을 통해 두 개의 진영으로 단순화되었다가 (연합국 vs 추축국), 다시 전후에는 새로운 이념 대결 구도로 양분되었다 (자유진영 vs 공산진영). 이러한 전후 질서는 2차 대전의 결과 형성된 미국과 소련의 양강 구도와 그들을 중심으로 한 동맹 네트워크 (NATO, 바르샤바조약 등)에 기반하였다. 또한 전쟁 전 유럽 중심의 국제정치가 전쟁 후에는 미·소 중심의 냉전체제로 재편됨에 따라,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의 등장, 식민지 해방, 비동맹 운동 등 새로운 움직임도 전후 질서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요약하면, 2차 세계대전은 국제 질서를 재편한 분수령이었다. 전쟁 전의 동맹과 적대 관계는 전쟁의 발발과 경과를 결정지었고, 전쟁의 종결과 함께 국제 사회의 권력 구도는 전혀 새로운 형태로 탈바꿈하였다. 경제적 패권 이동, 무역 체제 변화, 그리고 동맹 관계의 재정립을 통해 형성된 전후 세계는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다.
참고 자료: 각주 및 지도 참고. (본 보고서는 1930~40년대의 무역통계와 산업지표econlib.orgpublish.iupress.indiana.edu, 그리고 2차 대전 전후 국제관계에 대한 역사적 연구investopedia.comiwm.org.uk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