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올리는 순서때문에 뒤바뀌었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부터
제 3차 대전 까지의 발발을 염두에 둔
역사에서 흔적을 찾아 가는 과정입니다.
원인, 무역 패권 경쟁과 전후 질서 변화
1. 전쟁 발발 전 동맹 구조와 열강의 역학 관계
1914년 유럽의 군사 동맹 지도. 녹색으로 표시된 삼국 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갈색으로 표시된 삼국 동맹(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대립 구도
20세기 초 유럽은 두 개의 군사 동맹 블록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쪽은 삼국 동맹으로 불린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의 동맹이고, 다른 한쪽은 삼국 협상으로 불린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협력 체제였다en.wikipedia.org.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까지 포섭한 삼국 동맹을 구축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고자 했고, 이에 맞서 프랑스는 1894년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데 이어 1904년 영국과 **앙탕트 코르디알(Entente Cordiale)**로 불리는 협력을 이루고 1907년 영국-러시아 협정을 통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의 삼국 협상을 완성했다en.wikipedia.org. 삼국 협상은 공식 조약 형태는 아니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오랜 식민지 분쟁을 조정함으로써 세 나라가 상호 협력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en.wikipedia.org.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 국제정치는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대 영불러 협상의 구도로 굳어졌다.
이러한 동맹 대립 구도는 전쟁 발발과 함께 현실로 나타났다. 1914년 6월 사라예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동맹 관계에 따라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며 참전하자 영국·프랑스·러시아도 협상국 측으로 참전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최초 동맹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전쟁 발발 직후 중립을 선언했다가 1915년 협상국 측에 가담하였고, 5월에는 동맹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한 뒤 15개월 후에는 독일에도 선전포고하며 결국 연합국 편에서 싸웠다en.wikipedia.org. 한편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이해를 같이하여 1914~1915년에 중앙동맹국 측에 합류함으로써 대전 구도가 형성되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국(협상국) 진영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1917년 혁명으로 이탈), 이탈리아(1915년부터), 세르비아 등의 국가들뿐 아니라 일본(영일동맹에 따라 1914년 참전), 미국(1917년 참전) 등이 포함되었고, 동맹국(중앙국) 진영에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가 속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중 동맹 관계의 이합집산으로 말미암아, 전쟁 전 맺어졌던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게 되었고 전쟁이 연합국 vs 동맹국의 양대 진영 싸움으로 발전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면서 해당 동맹은 소멸되었고, 승전국인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도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게 되었다.
2. 전쟁 전 주요국의 경제적 위상과 무역 패권 경쟁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 열강들은 산업화 수준과 경제력에서 큰 격차를 보였다. 19세기 내내 세계 제조업과 해상 무역을 주도했던 영국은 여전히 거대한 산업 생산력과 세계 최대 식민지를 바탕으로 경제력이 가장 컸으나, 20세기 초에 들어 독일과 미국 등의 급성장으로 영국의 상대적 우위는 줄어들고 있었다researchgate.net. 독일 제국은 1871년 통일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 공업 생산과 과학기술력에서 영국을 빠르게 추격했고en.wikipedia.org, 특히 철강, 석탄 생산 등 중공업 부문에서 영국을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인구와 자원에서 영국·독일에 못 미쳤지만 안정된 산업 기반과 식민지 시장을 갖추고 있었고, 러시아 제국은 방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공업화 초기 단계의 성장세에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은 주요 열강 중에서는 비교적 산업화가 늦어 공업 생산력에서 선두국들과 상당한 격차가 존재했다.
당시 주요 교전국들의 경제 지표를 보면 이러한 위상이 잘 드러난다. 아래 표는 1913년을 기준으로 한 주요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 추정치와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정리한 것이다axisandallies.fandom.comresearchgate.net:
국가 | 1913년 GDP (억 1990달러)axisandallies.fandom.com | 세계 제조업 생산 비중 (1913년)researchgate.net |
영국 (대영제국 전체) | 4,730 (약 473조 달러) | 약 14% (19세기 말 32% → 1913년 14%로 감소)researchgate.net |
독일 | 2,390 (약 239조 달러) | 약 16% (산업화로 급성장) |
프랑스 | 1,640 (약 164조 달러) | 약 6% |
러시아 | 2,380 (약 238조 달러) | 약 8% |
오스트리아-헝가리 | 1,005 (약 100.5조 달러) | 약 4% |
이탈리아 | 950 (약 95조 달러) | 약 2% |
주: GDP는 1990년 기준 달러 PPP 환산 추정치이며, 영국의 경우 인도 등 식민지 포함
axisandallies.fandom.com. 세계 제조업 비중은 1870년 대비 1913년 변화 추세를 참고함researchgate.net.
위 표에서 보듯 영국은 1913년 당시 전 세계 GDP의 약 18~19%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경제권이었으나 (식민지 경제 포함) 제조업 부문의 세계 점유율은 약 14%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researchgate.net. 이는 같은 시기 **독일의 제조업 비중(약 15~16%)**과 비슷한 수치로, 독일이 영국을 산업 생산에서 거의 따라잡았음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경제력은 이들 두 강대국보다 작았지만 유럽 내 세 번째 공업국이었고, 러시아는 GDP 규모에서는 독일·영국에 필적했으나 농업 비중이 크고 1인당 소득이 낮아 산업력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해군력과 해상 무역 측면에서, 영국은 전통적으로 세계 최대의 상선단과 해군력을 보유하여 19세기 동안 전 세계 해운물동량과 교역로를 지배해왔다researchgate.net. 이러한 영국의 해상 무역 패권은 거대한 선단과 글로벌 해군 기지를 기반으로 유지되었는데, 영국은 값싼 원료와 식량을 식민지 및 해외에서 수입하고 공산품을 수출하는 무역 구조로 번영을 누렸다researchgate.net. 그러나 독일 역시 해군 확장과 상선단 육성에 나서며 영국의 해상 패권에 도전했다. 1900년대에 들어 독일의 티르피츠 제독이 이끄는 함대 증강 정책으로 영국-독일 해군 군비 경쟁이 벌어졌고, 독일의 상선단 규모도 세계 2위로 성장하여 유럽 대륙 및 해외 시장에서 독일 제품의 존재감을 높였다en.wikipedia.org.
당시 식민지 개척과 해상 교통로 장악을 둘러싼 경쟁은 국제 무역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확보하여 원료를 확보하고 상품 시장을 확보하려고 다투었는데, 이러한 식민지 패권 경쟁은 모로코 위기(1905년, 1911년)와 같이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할 뻔한 사건들을 낳았다en.wikipedia.org. 다행히도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파쇼다 사건 등을 조정하고 모로코에 대한 독일의 도전을 함께 견제하는 과정에서 협력이 강화되어, 식민지 분쟁이 오히려 영불 협력을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en.wikipedia.org.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와 맺은 협상 관계를 통해 자국 해군력이 지켜주는 **해상 무역로(수에즈 운하, 지중해, 인도양 경로 등)**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했고, 독일은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 같은 사업으로 중동까지 영향력을 넓혀 영국의 인도 방면 이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무역 관계는 또한 국가 간 이해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영국과 독일은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상호 최대 교역국 중 하나였을 만큼 경제적으로 밀접히 연계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호 의존적 무역 구조 때문에 재계와 금융계 엘리트들은 평화 유지가 이익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en.wikipedia.org. 실제로 전쟁 전까지의 무역 마찰이나 관세 분쟁 자체가 직접적인 군사 충돌로 비화한 사례는 없었고, 상호 투자와 차관 제공 등을 통해 경제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었다en.wikipedia.org.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패권 경쟁과 지정학적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자, 방대한 무역 이익에 위협이 되더라도 결국 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을 막진 못했다.
3.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표면적 계기와 근본적 원인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14년 6월 28일 일어난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이 사건이 전유럽을 위기 상태로 몰아넣었다en.wikipedia.org.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 대공 암살 사건을 국가적 존립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 명분(casus belli)으로 삼았다en.wikipedia.org. 실제로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고령이었는데 후계자인 대공이 피살된 것은 제국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다en.wikipedia.org.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선전포고함으로써 촉발된 7월 위기 동안, 동맹 맺은 열강들이 줄줄이 개입하면서 사태는 발칵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 암살 사건은 표면적인 계기에 불과했고, 이미 그 이전 수십 년간 누적된 열강 간의 긴장이 없었다면 단일 사건만으로 세계대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실제로 1914년 8월 당시 영국의 한 잡지는 대공 암살을 두고 “개탄스럽지만 상대적으로 하찮은 이유”에 불과하다고 평했으며en.wikipedia.org, 역사학자들도 1904년이나 1911년에 이런 암살이 벌어졌다면 전면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en.wikipedia.org. 다시 말해, 암살 자체보다 그때까지 축적된 군비 경쟁과 외교적 긴장이 있었기에 1914년에 전쟁으로 비화되었다는 것이다en.wikipedia.org.
제1차 세계대전의 근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오랜 열강 간 패권 경쟁과 제국주의적 대립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신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강대국들은 전 세계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고, 이에 따른 충돌과 불만이 누적되었다. 특히 독일은 통일 이후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여 “세계 정책(Weltpolitik)”을 표방하며 공격적인 해외 팽창 외교를 펼쳤다en.wikipedia.org.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해군력 강화와 식민지 확보를 통해 독일을 영국과 맞먹는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였고, 이러한 독일의 세계정책은 영국·프랑스 등 기존 열강과 마찰을 빚어 독일 스스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en.wikipedia.org. 반면 영국은 “빛나는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 불리던 독자 노선을 버리고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과거의 경쟁자였던 프랑스, 러시아와 협력하게 된다en.wikipedia.org. 영국에게 독일의 도전은 곧 해상 무역로와 식민지에 대한 위협으로 비쳤고, 따라서 영국은 해군력 우위를 지키고 유럽 대륙에서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20세기 초 가속화된 영국-독일 해군 군비 경쟁은 양국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다en.wikipedia.org. 독일이 대양해군을 건설하고 식민지를 확대하려 하자, 영국은 이에 위협을 느껴 프랑스와 러시아와 협조하는 한편 해군력 증강으로 대응했다en.wikipedia.org. 이런 제국주의적 경쟁과 군비 경쟁(특히 해군력)이 전쟁의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둘째, 동맹 체제와 군사 전략의 경직화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앞서 살펴본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으로 유럽이 양 진영으로 양분되자, 어느 한 곳에서 분쟁이 발발해도 도미노처럼 동맹국들이 개입하여 전면전으로 번질 위험이 높아졌다. 실제로 1914년 7월에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발단이었지만 독일이 오스트리아 편에 서고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면서 양 진영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는 국익의 충돌이라기보다는 동맹 의무와 선제 전략에 따른 것이 컸다. 독일은 러시아의 동원을 보고 먼저 선전포고하였고, 프랑스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시플랑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침공함으로써 영국까지 참전하게 만들었다. 각국은 수십 년간 전쟁 대비 계획을 세워왔기에 일단 위기가 시작되자 이를 멈출 유연성이 없었다. 이처럼 긴장 상태에서의 군비 확장과 선제공격 док트린 등 군국주의적 분위기 역시 전쟁을 촉발한 배경으로 지목된다.
셋째, 민족주의와 지역 분쟁이다. 발칸 반도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 이후 세력 공백을 틈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운 세르비아 등이 팽창을 도모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국 내 슬라브계 소수민족 분리주의가 자극받을 것을 우려하여 세르비아를 억누르려 했다en.wikipedia.org. 특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을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은 가운데 발생한 것이 바로 사라예보 암살 사건이었다.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족인 세르비아를 보호자 처럼 여겨 지원했고, 동시에 전략적으로 흑해에서 지중해로 통하는 터키 해협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발칸에서의 세력을 넓히려 했다. 제정 러시아의 대외무역의 절반 가량이 터키 해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독일이 오스만과 협력하여 해협을 장악할 가능성은 러시아로선 중대한 위협이었다en.wikipedia.org.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발칸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오스트리아-독일과 대립각을 세웠고, 이것이 전쟁 전 유럽 긴장의 한 축이었다.
以上의 구조적 원인들—제국주의적 패권 다툼, 동맹 대립, 군비 경쟁, 민족주의 분쟁 등—으로 인해 유럽은 화약고처럼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였고, 사소한 불꽃(사라예보 사건)이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국 각 국은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는데, 그 전쟁 목적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패권 강화와 이권 확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독일은 유럽 대륙과 해외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립하고 “떠오르는 세계 강국”으로서 식민지와 해군력을 확장하려는 목표를 품고 전쟁에 임했다en.wikipedia.org. 독일 지도부는 전쟁을 통해 프랑스와 러시아를 굴복시켜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잡고, 나아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영국·프랑스를 제치고 독일 식민 제국을 넓힐 구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당초 유럽 대륙 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벨기에 중립 침해와 독일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참전했다. 영국의 근본 전략 목표는 해상 무역로를 수호하고 유럽에서 패권을 노리는 단일 강대국 출현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은 전쟁 목적을 독일 해군과 식민지 세력을 꺾어 자국의 해양 패권을 재확인하는 데 두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 이후 빼앗긴 알자스-로렌 지역을 되찾고 독일의 위협을 영구히 제거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또한 독일에 대한 승리를 통해 자국의 식민지 제국을 안전하게 유지·확대하고, 국제적 위신을 회복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여 세르비아를 지원함으로써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유지·강화하려 했다. 궁극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여 흑해 함대의 출구인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지중해로 진출하여 warm-water port(부동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적 야심이 러시아의 전쟁 동인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민족 제국의 붕괴를 막고 제국 내 슬라브 민족주의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세르비아를 신속히 응징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설령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더라도 단호하게 세르비아를 제거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동맹 측에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와 영토 갈등(남티롤, 트리에스테 등 미수복 이탈리아 지역)이 있었던 터라 전쟁 발발 후 신중히 관망했다가 협상국이 승리할 것 같아지자 1915년 런던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의 목표는 민족통일 완성과 아드리아 해 패권 확보였는데, 결국 전승국이 되어 약속된 일부 영토를 얻었지만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영국에 밀려 약화일로였던 상황에서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패배 직전의 제국 위신을 세우고 영국·프랑스로부터 영토를 지킬 마지막 기회를 엿보았다. 오스만은 영국에 빼앗긴 이집트와 키프로스 등을 되찾고, 러시아 남하를 좌절시켜 자국의 존립을 유지하려는 희망을 걸고 참전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각국이 표방한 전쟁 목적은 저마다 달랐지만, 궁극적으로는 국제 질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패권 추구와 전략적 이익(식민지, 무역로, 영토 등)의 확보로 귀결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전후 무역 질서와 국제 관계의 변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유럽 및 세계 질서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1918년 11월 독일 및 동맹국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승전국과 패전국의 경제력과 지위는 극적으로 재편되었다. 우선 세계 무역 질서 측면에서, 종전 직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옛 패권국들은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미국이 새로운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전쟁 전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던 런던은 전후 막대한 대외 채무에 시달렸고, 영국 정부 지출은 GDP의 절반을 넘길 정도로 팽창하여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en.wikipedia.org. 영국은 전쟁 물자 구매를 위해 보유하고 있던 미국 투자자산을 대거 현금화하고 월가에서 거액을 차입해야 했으며, 1916년 무렵에는 순채무국으로 전락하였다en.wikipedia.org. 그 결과 전후 국제 금융 중심은 뉴욕으로 이동하였고,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떠올랐다. 1919년 이후 미국은 승전국들에게 막대한 전쟁 대부금을 회수하려 했고, 영국·프랑스 등은 이를 독일에 부과한 배상금으로 충당하려 하였다en.wikipedia.org. 독일은 다시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빌려 배상금을 지급하는 복잡한 금융 순환이 이루어졌으나, 이러한 취약한 구조는 1931년 세계경제 공황 속에 붕괴되고 말았다en.wikipedia.org. 한편 프랑스 역시 전쟁 피해가 자국 영토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여 공업 지대가 황폐화되고 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프랑스 정부 지출도 GDP의 50%를 넘을 만큼 국가경제가 전시체제로 기울었으며, 전후 경제 복구를 위해 독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의존하게 되었다en.wikipedia.org. 독일은 말할 것도 없이 패전으로 인해 경제적 파탄을 맞았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 의무를 지우고 알자스-로렌 등 산업지대를 상실하게 했으며, 모든 해외 식민지를 몰수당하게 했다en.wikipedia.orgen.wikipedia.org. 패전 직후 독일은 국내에서 정치 혼란과 함께 인플레이션이 폭발하는 등 경제가 무너졌고, 국제 무역에서 독일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예 해체되어 다수의 신생 독립국들로 분리됨으로써 중앙유럽의 기존 경제권이 산산조각났다. 제국 시절 통합된 관세 영역과 철도망이 있었던 지역들이 국경으로 갈라지면서, 해당 지역의 전후 무역 구조는 재편을 피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1917년 혁명으로 전쟁에서 이탈하고 곧이어 내전에 돌입함으로써 유럽 경제에서 거의 이탈한 상태가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1918)으로 독일과 separate peace를 맺고 폴란드, 핀란드, 발트3국 등 서부 영토를 상실하였는데, 전쟁 후 이들은 모두 독립 국가로 새로 탄생하였다en.wikipedia.org. 결국 1922년 러시아에 공산주의 정권(소비에트 연방)이 들어선 뒤 한동안 자급자족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구축하였고, 이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과 러시아의 단절을 의미했다.
전후 국제 무역 질서의 변화는 식민지 체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전쟁 전까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제국에 속해 있던 여러 민족들이 독립함에 따라 신생 국가들이 다수 등장했다. 폴란드가 123년 만에 독립을 되찾았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세르브-크로아트-슬로벤 왕국)**가 탄생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별개의 공화국이 되었다en.wikipedia.orgen.wikipedia.org.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도 러시아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 국가가 되었다en.wikipedia.org. 중동 지역에서는 패전국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어 터키 공화국만 남았고, 그 옛 영토들인 이라크,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사실상의 식민 지배 하)으로 넘어갔다.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도 아프리카와 태평양에서 모두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승전국들에게 위임통치 형태로 분배되었다. 이로써 전통적 식민 제국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영토를 다소 확장하였지만, 전쟁 비용 부담으로 인해 오히려 식민지 경영을 지속하기 어려운 재정 위기에 처했다. 반면 일본은 연합국으로서 독일의 중국 산둥 반도 이권과 남태평양 도서 영토를 넘겨받아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미국 역시 전쟁 특수로 제조업·수출이 호황을 누리며 국제 시장에서 유럽의 입지를 상당 부분 대체했다. 전반적으로 전쟁 전 세계 무역을 주도하던 유럽의 비중은 낮아지고, 미국이 금융과 산업 생산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세계 경제 패권이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외교 면에서 전후 국제 질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되었다. 승전국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창설하여 향후 전쟁을 방지하고 협력을 도모하고자 했다. 국제연맹은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최초의 범세계적 국제기구로 출범하였으나, 전후 다양한 국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en.wikipedia.org. 특히 결정적으로 미국이 상원 반대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서 집단안보체제에 구멍이 생겼고, **소련(옛 러시아)**도 초기에는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불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독일 문제를 두고 전략 차이를 드러냈다. 프랑스는 독일의 재기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려 했던 반면, 영국은 독일 경제의 회복이 유럽 안정에 필요하다고 보아 비교적 관대하게 대하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전승국 공조가 완벽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는 대독 안보를 위해 동유럽의 신생국들과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1921년에는 프랑스가 폴란드와 상호원조 동맹을 맺었고,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과도 **작은 협상(소앙탕트)**이라고 불리는 연대 관계를 형성하여 독일과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전승국이었지만 약속받은 영토 중 일부(달마티아 해안 등)를 얻지 못해 “승리한 패배국”이라 불릴 정도로 국민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탈리아는 전후 연합국들과 사이가 소원해졌고, 이런 실망감은 1920년대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의 공격적 외교로 이어져 후일 독일과의 추축 동맹을 형성하는 토양이 되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체제 하에서 군사력과 외교적 주권이 크게 제한되어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었다. 그러나 1922년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라팔로 조약을 체결하여 서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경제 협력을 시작하였다en.wikipedia.org. 표면상으로는 무역 및 경제 협력 조약이었지만, 이면에는 독일이 소련 내에서 군사 훈련 및 신무기 개발을 은밀히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군사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en.wikipedia.org. 이는 패전국 독일과 혁명국 소련이 국제 사회에서 받은 고립을 상호 보완하려 한 현실적 선택으로, 베르사유 조약 체제를 흔드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전후 1920년대의 국제 관계는 전쟁 전 동맹 구도와는 전혀 다른 합종연횡이 전개되었다. 과거 협상국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 배상금 문제 등으로 때로는 대립했고, 옛 동맹국이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제각기 공화국으로 전환되어 과거의 제국 체제는 사라졌다. 유럽의 지도도 크게 바뀌어, 새로운 민족 국가들이 등장하고 제국들은 해체됨에 따라 세력균형의 판도가 재편되었다en.wikipedia.org.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제 연맹이라는 새로운 협력 틀도 생겨났으나, 궁극적으로 전간기의 불안정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en.wikipedia.org.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성립된 베르사유 체제는 패전국들에게 가혹한 평화를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잠재적인 불만을 남겼고, 경제적 혼란과 맞물려 불과 20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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