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욕구와 대인 관계

인간의 본성:

 

일주일 전 새로운 미화 여사님이 오셨다.

다른 분과 달리 이 분은 경비 사무실을 자주 들른다.

그리고는 다른 미화 사원끼리의 불편사항을 토로 하고

자신이 허물이 없음을 대화를 통해 인정 받으시려 한다.

그녀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왜 나의 시간과 공간을 빼앗는가?

나야, 박절하게 쫓아내지 못해서 들어오시라 했지만,

혼자서 믹스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험담과 나는 관심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가신다.

 나는 커피를 못 마신다.

그리고, 오늘 새벽 출근해서 있는데 또 내 뒤를 따라 들어 오신다.

, 같은 소리에 혹시 내가 또 다른 경비가 자신을 나쁘게 생각 할까 보아 얘기 한다고 하면서,

묻지도 않는 자기 변명을 하신다.

일하러 오셨으면 일만 하고 가시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미화 사원님들이 무엇을 하건 관심 없다고 말씀해 드렸다.

잘 이해 했는지는 다음에 또 쳐들어 오는지를 보면 알 것이다.

이렇듯, 진정으로 신과의 대화가 부족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자기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실을 본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인간의 본성 중에는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 같다.

남에게 착하게 보이고 싶은 욕구,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 등.

이 모든 것이 나를 남보다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구에서 발현한다.

남자들이 이성 앞에서 의기양양 잘난 체 하는 모습,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모습,

이 모든 것은 돋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한다.

심지어 돋보이고 싶은 나머지 일부는 학력을 위조하기도 하며,

바탕의 얼굴을 모두 갈아 엎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실로 거짓과 성형은 한 인간을 창조하고 있으니 이야 말로 현대의 산파라 아니할 수 없다.

산파가 별것인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산파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성형과 거짓말 그리고 정신의 개조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사람들의 끊임 없는 재창조 노력은 높이 사줄 만 하다.

 

욕구는 궁극적으로 망하는가:

 

인간은 원시시대이건 현대이건 욕망을 벗어 버린 적이 없었다.

원시의 욕망이 공동체의 욕망이었다면, 현대의 욕망은 개인의 욕망이다.

원시의 욕망은 집단과 집단의 갈등을 가져오지만, 현대의 욕망은 개인간의 갈등을 가져온다.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욕망을 알고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욕망 실현의 끝판왕인 것 같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에는 사기꾼이 판을 치고 있다.

타인의 욕망에 불을 지펴,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자가 많다는 말이다.

 특히 타인을 의식하는 한국인들이야 말로

욕망의 덫 위에 서성거리는 한 톨의 쌀알과 자기의 목숨을 바꿀 수 있는 참새 같은 존재이다.

자기의 욕망절제와 사기꾼의 덫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욕망을 알아차리는 노하우는 필요 한 것 같다.

 

욕망의 제어:

 

욕망의 제어는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버릴 때 절제된 욕망과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

그럼, 욕망은 어디서부터 생길까?

나와 세상을 분리하기 시작 할 때부터 욕망은 비롯 되는 것 같다.

시 공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할 때부터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된 욕망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내가 세상이 되었을 때, 세상 속 나는 자유롭게 유영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식 시장을 예로 들어 보자,

내가 시장이 되고 각각의 투자자가 되어 시장을 바라볼 때,

나는 시장을 예측할 수 있고 준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적 욕망의 덫에 씌어 편협한 자신의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볼 때

나의 판단이 시장의 판단과 일치 하리라는 것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세상에 나와서 나를 찾는 과정이 유년기의 시절 이었다면,

장년의 성공한 삶은 나를 버리는 과정속에서 우리가 취하는 삶의 열매인 것 같다.

자아를 버리는 일의 첫째는 나와 주변의 경계를 허무는 일에서 시작 한다.

자아와 주변의 경계를 허무는

욕망이 없는 욕망속에서 나의 자아는 좁아터진 나로부터 탈출하고

신과의 만남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과의 만남, 신과의 대화를 이루고 가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표가 아닌가 싶다.